![[TEST #010]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포스터](/uploads/board-body/7de836426b7e479caa34d804488134ff.webp)
[TEST #010]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
십자가를 '구경'에서 '묵상'으로 — 〈패션 오브 크라이스트〉
호불호가 이렇게까지 갈리는 영화도 드물다.
너무 잔혹해서 못 보겠다는 사람, 유대인을 적으로 그렸다며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, 극장에서 흐느끼며 본 사람도 있다. 나는 후자에 가깝지만, 그 비판들을 외면한 채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.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통과한 뒤에야, 이 영화가 왜 한 편의 영화를 넘어 '수난 묵상'이 되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.
잔혹함이라는 비판
먼저 인정하자.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이 채찍질과 십자가의 길로 채워져 있고,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장면이 이어진다. 이걸 '신앙을 빙자한 폭력'이라 비판하는 시선을 나는 이해한다.
다만 가톨릭 신자에게 이 잔혹함은 낯선 것이 아니다. 우리는 사순 시기마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걸으며, 채찍질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세 번 넘어지시는 그분을 한 처 한 처 멈춰 서서 바라본다. 묵주기도의 고통의 신비도 마찬가지다. 이 영화는 바로 그 전통적 묵상을, 화면 위에 길고 처절하게 펼쳐 놓는다.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. 그토록 자주 입에 올리던 '수난'을, 우리는 정말 마주 본 적이 있는가.
적은 누구인가 — 반유대주의 논란 앞에서
더 무거운 비판은 반유대주의 논란이다. 이 영화를 "예수를 죽인 유대인"의 이야기로 읽는다면, 그것은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독법일 뿐 아니라 가톨릭 신앙으로도 틀린 독법이다.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 시대의 유대인 전체나 오늘의 유대인에게 집단적 죄로 돌릴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쳤다.
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민족과 민족의 대결로 보지 않는다. 예수가 맞선 것은 '유대교'가 아니라, 종교를 사람 위에 올려놓고 권력의 도구로 삼은 위선이었다. 그리고 그 위선은 특정 민족의 것이 아니다. 신앙의 언어로 제 자리를 지키려는 마음 — 그것은 모든 시대, 모든 공동체, 솔직히 우리 자신 안에도 있다.
가톨릭 신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. 십자가 앞에서 신자는 손가락질할 대상을 찾지 않는다. 미사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'나의 죄'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. 영화의 채찍을 내려치는 손, 십자가에 못을 박는 손에 멜 깁슨 감독 자신의 손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유명하다. 이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는 '저들'이 아니라 결국 '나'라는 것 — 그것이 이 장면이 던지는 가톨릭적 고백이다.
죽은 언어로 되살린 '그때 그곳'
영화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건 잔혹함이 아니라 언어였다.
등장인물들은 아람어와 라틴어로 말한다. 흥행을 노렸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. 죽은 언어로 가득한 화면 앞에서, 익숙한 성화 속에 박제된 예수가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 위에서 실제로 숨 쉬고 땀 흘리던 분의 시대로 끌려 들어간다. 강생(降生)의 신비, 곧 '말씀이 사람이 되심'을 머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장치다. 사람이 되신다는 건 찢기고 피 흘리는 육체를 진짜로 짊어지신다는 뜻임을, 이 영화는 도망치지 못하게 붙든다.
최후의 만찬과 십자가, 그리고 성체
이 영화에서 가톨릭 신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연출이 있다. 십자가 위의 수난 장면 사이사이,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이 회상으로 끼어든다. 빵을 떼어 "이는 내 몸이다" 하시던 그 손과,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몸이 한 화면 안에서 겹친다.
이것은 단순한 편집 기교가 아니라 성찬의 신학 그 자체다. 우리가 미사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가 곧 십자가에서 내어 주신 그 몸이라는 진리를, 영화는 말이 아니라 영상으로 설교한다. 제대 위에서 매일 다시 봉헌되는 그 사랑을, 골고타의 피와 나란히 놓아 보여 준다. 이 한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'가톨릭적'이다.
어머니의 시선 — 비탄의 성모
그럼에도 이 영화의 진짜 심장은 폭력이 아니라, 그것을 지켜보는 한 사람의 눈에 있다.
성모 마리아. 아들이 무너지는 모든 순간을 그녀는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. 어린 예수가 넘어졌을 때 달려가 일으키던 어머니가, 이제 십자가를 지고 쓰러진 아들에게 다가가는 회상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. 카메라가 마리아의 얼굴에 머무는 동안, 우리는 더 이상 사건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식의 고통 앞에 선 어머니 곁에 함께 서게 된다.
가톨릭 전통은 이 자리를 오래도록 묵상해 왔다. 십자가 아래 선 어머니, '스타바트 마테르'의 슬픔. 영화는 마리아를 통해 관객을 '구경꾼'에서 '함께 아파하는 자'로 옮겨 놓는다. 그리고 그 자리야말로, 신앙이 시작되는 자리다.
마지막, 빈 무덤을 향하여
영화는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는다. 짧지만 분명하게, 부활의 아침을 비춘다.
이 마지막 빛이 없다면 〈패션 오브 크라이스트〉는 한 의인의 비극적 처형 기록에 머물렀을 것이다. 그러나 빈 무덤이 있기에, 앞선 두 시간의 고통은 절망이 아니라 구속(救贖)의 길이 된다. 가장 인간적인 얼굴로 죽으신 그분이, 신성의 영광으로 일어서신다. 가톨릭 신앙의 한가운데에 있는 파스카의 신비 — 죽음을 통과한 생명 — 가 마지막 몇 분에 응축되어 있다.
묵상으로서의 영화
다 보고 났을 때,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지 않았다. 오히려 사순절 십자가의 길을 한 처 한 처 따라 걷고 난 뒤의 그 먹먹함을 느꼈다. 손가락질할 대상이 아니라,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을 안고서.
이 영화는 잘 만든 종교영화이기 이전에, 한 편의 긴 묵상이다. 그래서 나는 이것을 가볍게 권하지 못한다. 다만 사순 시기 어느 저녁, 십자가 앞에 오래 머물고 싶은 분이라면 — 조용히 이 영화를 펼쳐 보시라 권할 뿐이다.